프로 권투선수와 매니저계약

최근 저희 법률사무소에서 프로권투선수의 매니저계약 해지 소송을 처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원의 조정을 통해 매니저계약을 해지하고 약간의 손해배상을 얻어내는 결과를 얻기는 하였는데, 소송을 처리하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어 적어 봅니다.

우선 한 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은, 선수와 매니저간의 계약 내용이 너무나도 부실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정한 매니저계약서 양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단 한장, 몇 줄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계약기간”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권투선수의 매니저계약은 이른바 “노예계약”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 선수의 하소연이었던 것입니다(종래 권투매니저계약의 문제점과 개선 노력에 대하여는 여기를 참조).

매니저계약과 관련된 분쟁은 비단 프로권투선수뿐만 아니라 가수, 탤런트와 같은 연예계에 있어서도 늘상 문제되는 것입니다(그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그러나 프로권투선수의 경우에는 다른 연예인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니저가 차지하는 위치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가수나 탤런트 등의 경우 반드시 매니저가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매니저가 일(광고출연, 드라마출연, 행사출연 등)을 따오지 않더라도 가수나 탤런트 본인이 직접 아는 사람을 통해 일을 얻더라도 그것이 법적으로 당연히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프로권투선수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더군요.  프로권투선수는 자신이 위원회에 등록한 매니저의 동의없이는 시합출전이 불가능합니다.  기존 매니저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매니저에게 이적할 수도 없습니다.  즉 매니저가 선수의 활동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매니저가 악의이든 능력부족이든 시합을 제대로 알선하지 않는 경우, 선수는 시합에 나가는 것이 원천봉쇄되고 , 매니저가 악의적으로 이적을 동의하지 않는 경우 다른 매니저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저와 얘기한 선수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권투위원회가 매니저계약 해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중재해주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권투위원회는 “전 매니저의 동의를 받아오라”고 하거나 “법원의 매니저계약부존재 확인 판결을 받아오라”고 합니다(아마도 권투위원회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처해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 선수는 이와 같은 사정을 노예계약이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선수는 매니저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답이 그러냐고요?  원래 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각각의 사실관계가 다양하기에 일률적인 답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도 일응의 룰(rule)은 있지 않을까요?

매니저계약은 말 그대로 선수와 매니저 간의 계약입니다.  어느 일방이 계약에 따른 의무를 불이행한 경우 상대방이 이를 해지할 수 있음은 당연합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과연 일방이 채무를 불이행한 사실이 있는지와 그와 같은 채무불이행이 누구의 잘못때문인지, 그리고 그와 같은 불이행이 “계약 해지”라는 결과를 용인할 수 있을만큼의 중대한 것이냐를 순차적으로 따져보고,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보게 될 것입니다(실제로 과거 ‘변정일 선수 사건’에서는 법원이 선수에 의한 매니저계약 해지를 인정하였습니다).

계약기간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기본적으로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기간은, 어느 일방이 자신의 의무를 중대하게 불이행한 사실이 없는한, 준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특수한 경우 계약서에 기재된 계약기간의 효력이 부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약관’에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만약 문제되는 매니저계약서가 매니저측에서 사전에 만들어놓은 양식으로서 선수나 연예인이 동 계약서의 내용에 대하여 개별협상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매니저가 제시하는 계약서에 그대로 날인/서명한 경우, 동 계약서는 약관에 해당되고 그 경우 상대방(선수나 연예인)에게 불리한 조항, 이를테면 지나치게 장기간의 계약기간 조항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매니저계약의 성격에 대하여는 여러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일종의 위임의 성격을 포함하는 계약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민법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위임계약은 당사자 일방이 언제나 해지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간의 정함이 없는 매니저계약 또한, 매니저계약체결일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이상 이를 해지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예산업이나 스포츠산업이 말 그대로 산업화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관련 이해당사자들 간의 법률관계가 제대로 된 계약서로 명확히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추후 당사자간의 불필요한 오해와 분쟁을 최소화하고 그에 따른 법률비용발생 또한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최근 들어서는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전문 기업, 전문 경영인도 등장하면서 차츰 그에 따른 법적인 정비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여전히 ‘구두계약’이 행해지고 있으니  말 다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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