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미국 영화계를 떠들석하게 만든 영화 중에 “보랏(Borat)”이라는 코미디 영화가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 사람인 ‘보랏’이 미국에 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게 되는 일들을 코믹하게 그렸는데요. 마치 어릴 적에 본 ‘부시맨’을 연상시키면서도, 부시맨의 그것보다는 훨씬 노골적이면서도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톤의 영화입니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들 사이에서 ‘보랏’이라는 영화는 두고 두고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를 상대로 한 소송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 속에는 ‘보랏’이라는 인물이 미국의 길거리에서 만난 일반인들과의 대화나 그들의 반응을 웃음거리로 담고 있는데, 문제는 그와 같은 에피소드에 포함된 일반인들이 자신의 허락없이 촬영을 한 데 대해 초상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 최근 ‘보랏’ 사건에 대하여 최근 미국 법원의 첫번째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사건의 원고는 Jeffrey Lemerond라는 미국인인데요, 영화 장면 중 ‘보랏’이 길거리에서 원고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자, 원고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13초짜리 영상이 담겨 있습니다. 원고는 자신은 영화를 촬영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영화촬영에 동의한 바도 없으므로 이는 명백한 초상권 침해라며 제작사인 20세기 폭스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미국법원은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결론적으로, 미국 뉴욕주 법원은 원고의 초상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며, 2008. 3. 31. 원고 패소 판결을 하였습니다(판결문은 여기).
소송이 제기된 뉴욕주의 경우 성문법규정으로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이름, 초상, 목소리 등을 허락 없이 광고(purpose of advertising)나 거래의 목적(purpose of trade)으로 사용할 수 없다”며 프라이버시권(privacy)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광고나 거래의 목적’이 아니면 동의 없이 타인의 초상 등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욕법원은 위에서 말하는 ‘광고나 거래의 목적’을 매우 좁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시사보도성이 있거나 공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사항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광고나 거래의 목적’에 해당하지 않고 따라서 동의 없이도 타인의 초상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뉴욕주 법원은 ‘시사보도성’(newsworthiness)을 판단함에 있어 단순한 사실의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건, 사회적 트랜드, 공공의 관심사를 전달, 표현하는 경우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있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나 재미를 위한 것이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일례로서, 제이 레노(Jay Leno)의 투나잇쇼의 ‘헤드라인‘ 코너가 타인의 영상을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보았고, 유명한 방송진행자인 하워드 스턴 쇼(Howard Stern Show)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판결한 예가 있습니다).
결국 뉴욕주 법원은 순전히 상업적 의도가 있는 경우(이를 테면 제품선전달력에 타인의 이미지를 이용한 경우)만 초상권 침해로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사회의 분위기와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 ‘보랏’의 경우, 상업영화로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고 그 내용 또한 심오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코믹영화에 해당하여 ‘광고가 거래의 목적’에 해당되어 초상권 침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뉴욕주 법원은 달리 보았습니다. 즉 ‘보랏’ 영화가 현대 미국사회의 현실상과 병폐를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시사보도성(newsworthiness)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반 미국시민들이 보랏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복장, 그리고 말투를 보고 들으며 놀라고 이를 조롱하고 있지만, 반대로 보랏 또한 그와 같은 미국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자신 또한 기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문화의 상대성과 다원성을 시사하였던바, 바로 이것이 공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사항을 묘사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원고는 피고(영화제작사)가 영화예고편에 원고가 출연하는 장면을 삽입하여 수 차례 방영하였고, 이는 명백한 상업적 목적의 이용이므로 보호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뉴욕주 법원은 시사보도성과 공적 관심사에 속하는 사항인지는 그 내용 자체만을 놓고 보아야지 이를 제작한 자의 동기는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영화가 상업성을 지닌다거나 영화제작자가 이윤을 추구하였다 하여 그들이 공공의 관심사를 묘사할 권리를 잃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뉴욕주 법원의 판단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현재 영화 ‘보랏’과 관련된 여러 소송들이 전부 위 사건을 판결한 뉴욕법원의 판사 Ms. loretta preska 가 심리 중에 있다고 하니,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기각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영화나 드라마, 또는 뉴스 촬영 도중에 일반인들의 초상이 허락없이 촬영되어 방영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경우 제작자는 매번 일반인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초상권 침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초상권의 침해 문제는 주로 언론(TV, 신문, 잡지)보도와 관련하여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 법원은 “초상권과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는 언론의 보도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공적인 관심사 또는 공공의 이해와 관련되거나 그 보도가 중대한 공익상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원, 개방된 등산로, 스포츠경기장, 시위집회현장 등 공개된 장소에서는, 본인이 명시적으로 거절의사를 표시한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그것이 비방 목적이 없는 한, 초상권 침해는 되지 않는다고 봄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다만 대법원 2004다16280판결은 초상권 침해는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유만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촬영, 작성의 목적 또는 공표의 의도는 논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상업적 이용 목적에 한정하여 초상권 침해를 논할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법원과 학설이 제시하는 기준을 가지고 ‘보랏’ 사건을 살펴보면, 촬영이 이루어진 장소가 ‘뉴욕주의 길거리’라는 공개된 장소라는 점, 일반인이 명시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지는 않았다는 점, ‘보랏’이라는 영화의 주제의식(문화의 다원성과 상대성), 영화촬영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지만 이는 사실적인 연출에 기여하였다는 점 등은 초상권 침해를 부인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일반인이 명시적인 촬영거부 의사를 밝히진 않았지만 이는 제작자측에서 영화촬영사실을 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약 이를 알았다면 당연히 촬영거부 의사를 표시했을 여지도 있는 점, 일반인의 초상이 주장면에 부대하여 방영되는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반인을 일정한 상황에 빠지게 한 후 그에 따른 반응을 촬영할 의도였다는 점은 초상권 침해를 인정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최근, 드라마 제작과 관련하여 ‘보랏’ 소송과 유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드라마에 원고들의 연주회 장면이 촬영되어 방송되었는데, 당초 방송사는 원고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아 원고들이 초상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남부지방법원은 2006. 11. 29. 방송사측의 초상권 침해 책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유는 ‘당초 얼굴을 식별할 수 없도록 촬영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판결문은 여기).
위 드라마 사건은 원고들(일반인)이 처음부터 일정 조건을 내세워 촬영을 동의하였으므로(즉, 뒤집어 말하면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에는 촬영을 거부한다는 명시적 의사 표시), 그 조건을 어긴 방송사의 촬영은 초상권 침해에 해당됨이 분명한 사안입니다. 이 점 애초부터 촬영에 대한 동의나 조건 합의가 없었던 ‘보랏’ 사건과는 구분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일반인의 초상을 사용하려는 영화제작자나 방송제작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나 방송 기타 언론에서 일반인의 초상이 사용되는 경우는 참으로 다양하여 이를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본 여러 사례들을 일응의 기준으로 삼되, 각각의 문제되는 경우 사전에 변호사로부터 문제되는 부분은 없는지,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 자문을 얻어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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