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드라마에 등장하는 공인(주로 정치인)의 묘사와 관련하여 외국에서 명예훼손 판결 사례가 있었는지 문의하셨는데요, 소설의 경우에는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드라마의 경우에는 정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건으로는, 작년에 미국 드라마 “Law & Order”가 뉴욕주 정계와 법조계의 뇌물 스캔들을 묘사한 에피소드를 방영한 것을 두고 관련 변호사가 명예훼손소송(Libel)을 제기한 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방송사 측은 해당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변호사)은 상상속의 인물에 불과하다며 다투었지만, 법원은 그와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피소드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 인종, 직업 등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시청자로서는 그 인물이 ‘문제의 변호사'(원고)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나 법원이 방송사의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위 판결은 일종의 중간판결로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변호사가 과연 원고를 지칭하는지의 이슈가 다루어진 것이고, 현재는 그렇다면 나아가 원고의 명예가 훼손된 것인지에 관하여 소송 진행 중입니다.
영화 쪽을 보면, 작년 미국에서 덴젤 워싱턴 주연의 “아메리칸 갱스터” 사건이 있었습니다. 뉴욕주의 마약수사관들이 영화내용이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으로부터 기각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정치영화 Primary Colors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빌 클린턴측에서 명예훼손 소송이라도 제기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소송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사실 빌 클린턴은 그 영화의 열혈팬임을 자처하면서 존 트라볼타를 백악관으로 초청까지 했답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다른 주변인물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는 했더군요. 결과는 역시 패소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경우 소설, 영화, 드라마와 같은 픽션에 의하여 실존인물의 명예가 훼손되었는지에 대한 법적인 다툼이 종종 있어왔는데요, 말씀하신 공적인물의 경우 미국법원은 명예훼손의 인정요건을 보다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법원은 공인의 경우 해당 내용이 단순 허의를 넘어 악의(malice)의 수준에 이를 것까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패러디로 인정되는 경우에도 명예훼손은 인정되지 않고 말이지요.
실존인물의 영화화 혹은 드라마화와 관련된 법률 분쟁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분쟁 중의 하나입니다.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영화 등으로 제작하는 경우에는 많은 경우에 있어 명예훼손이나 사생활(privacy)침해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므로 사전에 본인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 인물이 공적인 인물이거나 표현된 내용이 상당부분 변형(transformative)되어 있거나, 명예훼손/사생활 침해와 무관한 내용이라면 동의가 없어도 무방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영화 등에 명예훼손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제작자측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고 그와 같은 믿음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 경우에도 명예훼손에 따른 법적 책임은 지지 않게 됩니다(이를테면 2005년 영화 ‘실미도사건’에서는 영화가 실존인물인 684부대원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닌지 문제되었으나, 법원은 “영화제작자는 문제되는 영화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명예훼손의 책임이 없다”고 판단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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