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 파이낸싱 딜-헐리웃 제작사의 영화 제작비 조달하기

영화제작자 입장에서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바로 파이낸싱, 즉 제작비 조달 문제입니다. 영화 제작비 조달(film financing) 기법이 발달된 미국에서는 수십가지의 파이낸싱 기법이 설명되고 있습니다(그 내용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이 중 슬레이트 파이낸싱 딜(Slate Financing Deal)이란, 영화제작사가 장차 제작할 수편의 영화를 하나로 묶어 일정액의 제작비를 사전에 조달받는 방법입니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프로젝트(영화)를 대상으로 하여 투자자와 제작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투자계약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지요.

슬레이트 파이낸싱 딜은 비교적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슬레이트 파이낸싱 딜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자금조달액이 수천억원에 이른다는 점과 종래의 자금조달 기법과 달리 일반은행(우리나라로 치자면 제1금융권)으로부터 영화제작비를 조달받는다는 점에 있어 보입니다(물론 게중에는 어마어마한 여유자금을 보유한 헐리웃/뉴욕의 사모펀드 private equity fund도 포함되어 있지만요).

일례로서,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소니픽쳐스는 2006년 1월경 도이치뱅크로부터 장래 제작할 18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하여 6억불을 조달받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였고(주간사: Relativity Media. 관련기사는 여기), ‘엑스맨’ 등 코믹물로 유명한 Marvel사는 메릴린치로부터 장차 10개의 캐릭터를 주제로 한 영화를 대상으로 하여 5억2,500만불을 조달받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습니다(당시 사용된 financing 계약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합니다).

그럼 왜 슬레이트 딜과 같은 투자방식이 도입되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아닐 수 있으나, 다른 투자기법과 구별되는 장점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자금 제공자(대여자) 입장에서 채권회수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지요. 우리나라의 시중은행들은 영화제작하는 데 수십억을 대출하는 것을 매우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투자은행의 심사역에 따르더라도 해당 영화가 성공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별다른 담보도 없이 대출을 하기란 어렵다는 것이지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보통 “High Risk, High Return”이라 합니다. 위험은 참으로 크게 따르지만 일단 성공만 했다 하면 그 어떠한 산업보다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리는 보수적인 은행에게는 먹히기 힘든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해외의 대형은행들을 수천억원의 영화제작비를 대여해주고 있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슬레이트 딜입니다. 왜냐하면 은행의 입장에서는 슬레이트 딜에 포함된 여러 영화 중 단 한편만 흥행에도 대출원리금을 상환받기에 충분한 경우가 헐리웃에는 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영화사가 장래 3년간 제작 예정인 영화가 10편이고, 10편 모두를 슬레이트 딜에 포함시켜 은행으로부터 제작비(이는 통상 위 10편 제작비 전부 또는 일부일 것입니다)를 조달받는 경우, 10편 중 9편이 망하더라도 단 1편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실패한 9편을 위해 투입된 제작비(대출원리금) 전부를 상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물론 이는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구조가 현실화될 수 있으려면 투자은행, 영화사, 변호사 간에 철저한 사전 조사와 documentation은 물론이고, completion bond 등 제도적인 뒷받침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헐리웃에서도 위와 같은 슬레이트 딜이 점차 뜸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전세계 경제를 강타하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종래 슬레이트 딜들이 계약대상의 범위를 “장래 5년간 제작될 영화들”이라는 등 장기간으로 하여 사실상 더 이상 새로운 슬레이트 딜의 대상이 될 영화들이 남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한 슬레이트 딜의 주요 당사자였던 헤지펀드들이 슬레이트 딜 참가에 점차 소극적인 자세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통상의 슬레이트 딜의 경우 은행과 헤지펀드가 공동으로 제작비를 대여하지만 그 상환순위에 있어서는 은행의 채권이 헤지펀드의 채권보다 먼저 상환되는 구조가 많은데, 헤지펀드 입장에서는 그에 따른 위험에 상응하는 return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에 관한 기사는 여기를 참조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레이트 딜은 대규모의 자금을 은행이나 펀드로부터 한꺼번에 유치할 수 있는 확실한 장점이 있어(또한 영화제작에 관한 전권(control) 또한 제작사가 갖는 장점고 있다고 합니다) 헐리웃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여전히 이를 필요로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종래의 슬레이트 딜 구조에 은행이나 펀드의 채권회수책을 보강하는 다양한 금융기법이 부가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건 그렇고,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현재의 시점에서 시중은행의 슬레이트 딜은 시기상조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completion bond 등 제작위험이 상당부분 제거되어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제작 과정의 체계화이라든지, 제작비 집행의 투명성, 영화제작 완성보장 등 보수적인 금융권의 시각에서는, 그리고 비영화전문가인 금융회사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다액의 투자를 집행하기란 아직 어려운 실정일테니까요.

그래도 한국영화의 제작비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고(과연 그와 같은 제작비의 상승이 합리적인 수준인 것인지는 별론으로 합니다), 고부가가치산업으로서의 영화산업이 주목받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영화 또한 자금조달(financing)의 선진화는 반드시 이루여져야 할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슬레이트 딜과 같은 미국의 financing방식도 충분히 참고하여야 할 대상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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